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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모더니티 자료 01_1929년 조선을 박람하다 1: 조선박람회기념사진첩

작성자
kuasiacontents
조회수
177
등록일
2019.09.18
수정일
2024.02.13

 

1929년 조선을 박람하다 1: 조선박람회기념사진첩

소명출판 2018년 08월

 

조선박람회를 주목하다

 

건국대학교 아시아콘텐츠연구소는 1929년 조선박람회의 기초 자료집으로 “1929년, 조선을 박람하다”(전4권)을 기획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제1권 ‘조선박람회 기념사진첩’, 제2권 ‘조선박람회 안내기’, 제3권 ‘조선박람회 포스터 기념엽서 팸플릿’, 제4권 ‘조선박람회와 매스미디어’이다.

“1929년, 조선을 박람하다”(전4권) 자료집은 2019년에 개최 90년을 맞이하는 조선박람회의 전체상을 파악하고 재조명하는 토대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번에 발간된 제1권 『조선박람회기념사진첩』은 1929년 9월 12일부터 10월 31일까지 50일 동안 옛 경복궁터에서 개최한 조선박람회를 기념하여 이듬해인 1930년 3월 20일 조선총독부가 공식 간행한 기념 책자이다.

 

지은이 _ 건국대학교 아시아콘텐츠연구소 (옮김)

강지훈, 고유정, 권희영, 권희주, 김경리, 김민화, 김병진, 김선희, 김현영, 도재학, 박기하, 박삼헌, 박하미, 방동훈, 변정아, 송민호, 심정명, 안남일, 염복규, 우지은, 유지혜, 이수경, 이효성, 임재철, 장나영, 정광식, 정유진, 최지호

목차

 

동아시아 모더니티 자료 총서를 발간하며 _ 박삼헌

 

조선박람회기념사진첩

 

사진으로 재현한 조선박람회장 관람기 _ 염복규

 

출판사 서평

 

박람회라는 대형 이벤트

근대 박람회란 자본주의 산업 발달에 기반하여 대량의 전시물을 배치, 시각적으로 과시하는 이벤트이다. 세계사적으로 박람회는 최초로 산업혁명에 성공한 영국에서 19세기 중반 시작되었다. 1851년 런던만국박람회가 그것이다. 더불어 서구 제국에서 박람회가 개시된 시점은 전세계적으로 제국-식민지 체제가 구축되는 시점과 일치한다. 그리하여 박람회는 태생부터 제국주의와도 결합해 있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직후 서구를 모방한 최초의 박람회로서 1877년 제1회 내국권업박람회(內國勸業博覽會)를 개최했다. 20세기 들어 제국주의 국가로 발돋움하면서 식민주의 디스플레이의 요소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1903년 제5회 내국권업박람회에는 식민지 타이완(臺灣)관이 처음 등장했다. 한국병합 후 1914년 도쿄다이쇼박람회(東京大正博覽會)에 이르면 타이완 외에 가라후토(樺太, 사할린)관, 조선관, 척식관, 만주관 등 여러 개의 (준)식민지관을 설치했다.

제국의 박람회에 설치된 식민지관의 역할은 어쩌면 단순하다. 제국, 문명, 선진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식민지, 야만, 후진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제국 일본 권역의 박람회가 모두 본토에서 개최된 것은 아니었다. 식민지 타이완이나 조선에서도 박람회를 개최했다. 그렇다면 이런 식민지 박람회의 디스플레이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1929년 조선박람회

조선박람회는 조선총독부가 각각 ‘시정 5년’, ‘시정 20년’, ‘시정 30년’을 기념하여 주관한 3대 박람회(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1929년 조선박람회, 1940년 조선대박람회) 중 하나이며, 1929년이라는 식민통치 중기의 시점에 개최한 박람회로서 제국 일본과 식민지 조선, 그리고 박람회 개최장소인 식민지 ‘수도’ 경성(京城)과 기타 지방도시, 나아가 본토 각 지역과의 관계의 다면적인 면모를 볼 수 있는 행사였다.

조선박람회는 세계적인 공황의 터널로 들어가는 시점(1929년)인 데다가 개최 시기도 농번기(9~10월)와 겹쳐 관람객 동원, 수지?타산의 측면에서는 실패했다는 것이 객관적 사실이다. 박람회 폐회에 맞춰 조선어 신문은 조선박람회는 “항상 시세와 민도로써 상투어를 삼는 당국이 축년(逐年)의 천재(天災)로 궁핍에 궁핍을 가한 조선인의 경제 상태를 불고하고 단행”한 것인데 “일시의 번영을 꿈꾸든 종로상가에 몰락”을 가져왔을 뿐이라고 비판했다(「社說:朝博의 影響」, 『東亞日報』, 1929.11.1). 따라서 사진첩 곳곳에 빈번히 등장하는 관람객의 물결은 일종의 기만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사진첩의 간행 주체가 조선총독부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민통치 중기의 시점에 개최된 조선박람회라는 대형 이벤트에서는 당대의 시대적 특징을 드러내는 코드를 읽어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다. 당장 『조선박람회기념사진첩』을 세밀하게 독해하는 작업을 통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식민지권력의 선전 이벤트라는 점이 이런 작업을 게을리 할 빌미가 되어서는 안 되리라 생각한다.

여기에서는 하나만 지적하고자 한다. 요시미 ?야에 의하면 일본은 서구 제국의 만국박람회에 출품할 때는 일본의 전통을 강조하며 비근대의 나라로 스스로를 위장하는 반면 본토와 식민지 박람회에서는 근대 국가로 행세하는 이중적 자기를 익혀나갔다고 한다. 이런 이해를 받아보자면 조선박람회에서 본토의 여러 지역이 자기를 드러낸, 즉 식민지 조선을 향해 자신을 발신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혼재되어 있었다. ‘근대 국가로 행세’하는 지역이 있는가 하면 ‘비근대의 나라로 스스로를 위장’하는 지역도 있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조선박람회에서 보이는 여러 코드는 제국 일본 판도 안에서 식민지 조선의 다면적인 지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이는 조선박람회 개최 장소인 식민지 ‘수도’ 경성의 지위 역시 제국 도시의 위계 속에서 유동적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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